드디어 착한 딸, 우등생, 모범생, SKY 출신, 잘 나가는 미국 스타트업 직원의 짐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의 정리 없이 말하고, 떠오르는대로 질문하고, 요점도 결론도 주제도 없이 대화를 멈출 수도 있는 자유가 생긴 것이다.

 

이미 나를 속박하던 굴레가 사라졌는데 그것도 모르고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내믿지 못하고 invisible fence 안에서만 지내는 pet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야생 동물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 것이다.   

 

 

 

Change Ground/웅이사의 하루 공부/더 이상 생각하지 마라 (f 생각하기를 멈춰야 할 때)/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스티븐 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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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그 사람의 잠재의식에 영향을 끼친다.

반사적인 말보다, 주도적인 말(자신감, 여유, 긍정)을 많이 하라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네 -> 자, 다른 대안을 찾아보자

그가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해 -> 나는 나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

그(들)이 허락하지 않을 거야 -> 나는 효과적으로 그(들)을 설득할 수 있어

 

반사적인 말의 숨은 배경에는 자신의 운명은 외부 요소에 의해 결정되어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배경이 된다.  나의 책임감, 통제력, 조절력도 없고, 극한으로 가면 피해의식에 젖는다.   

 

주도적인 말 습관으로 문제 해결자가 되는 것이다.

 

To Do: 내 관심의 circle(신앙, 부부 관계, 자녀 관계, 경제, sns...)에서, 내가 통제력/영향력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살펴보고, 영향력의 circle을 주도적인 말/태도로 키워나가자. 단 한가지라도 찾아내서 적극적인 에너지로 circle을 키워나가야 한다. 

 

To Do: 문제 해결이 외부에 달려있다는 생각이 들면, 생각을 멈춰야 할 때이다.  문제거리 안에서 허우적 대지 않겠어.  수동적으로 살지 않겠다고.  내가 주도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 내가 통제할 있는 것을 함으로서, 내 영향력의 circle을 키워나갈거야!

 

 

 

 

 

 

 

 

 

 

봄방학 끝나고 한 10일 동안 뉴욕 친구네 집에 있던 딸이 지난 주일에 집에 왔다.  코비드19이 심한 뉴욕이고 해서, 우리 부부가 데리러 가려고 길을 떠났지만, 딸은 혼자 비행기를 타고 오겠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공항이며 여러 가지로 우리가 데리러 가길 원했지만, 불필요한 지나친 힘듦이라며 딸이 반대했다. 

 

딸이 오고 다음날부터 그러니까 이틀 전 저녁에 딸은 열이 있고 목이 아프다고 한다.  딸은 집에 오면 알러지 등 자주 아팠고, 고열도 아니고 해서, 나는 그닥 걱정하지 않고 그저 잘 먹으라고만 했다.  다행히 딸은 식욕이 떨어진 것 같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엔은, 딸이 혹시 코비드 의심이 있으니까, 조심하라고 하면서, 간식도 딸 방으로 엔이 직접 가져다 주었다. 

 

다음날, 엔은 나는 딸 방에 들어도 못가게 하면서, 코비드 의심은 코비드라고 생각하고 대처하라고 했다.  딸은 열은 102 -102- 100.6 근처에서 맴돌고 목이 아프단다.  딸의 손이 닿았던 모든 것은 따로 봉지에 넣거나 버리고, 엔이 굉장히 신속하고 쎄게 대처하고 있다.  

 

오늘 아침에 딸은 병원에 가서 확인하길 원한다.  여전히 식욕이 떨어지지 않아서, 오늘 아침은 알찜을 먹겠다고 해서, 만들어 주었다.  딸이 먹은 음식은 엔이 설겆이 하고 나는 손도 못대게 한다.  고무 장감 끼고 세제로 하니까 괜찮다는 대도, 엔은 내가 어쩔때는 위생관념이 철저한 것 같은데, 도무지 감이 없다고 어제 부터 코비드19 관련 정보를 읽으라고 보내주고, 자신은 미친듯이 코비드19 연구 중이다.  엔은 며칠 전 컴퓨터 스트린을 살려고 할 때도, 미친 듯이 연구를 했다.  연구자라는 직업이 잘 맞구나 싶다.  대충한다는 것과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  타일을 할 때도 페인트를 할 때도 무엇을 하든지 한번 꽂히면 미친듯이 연구를 한다.  

 

딸과 엔이 병원에 다녀왔다.  스트렙 검사와 코비드19 검사를 위한 채취를 했고, 결과가 빨리 나오는 스트렙에서 positive가 나오면, 코비드19 검사는 안한단다.  스트렙이면 코비드 아닌 것은 아닐텐데,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딸도 좀 떽떽 거리고, 엔도 표정이 심각한게 장난아니다.  딸이 화난 태도를 대했나보다 싶기도 하지만, 엔은 왜 그리 심각한지 내가 불편하다.  엔은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했냐고 물어본다.  병원 갔다 오면 얘기 듣고 하려고 아직 안했다니까, 내가 딸 아픈 것을 숨기는 것 같다고 짜증을 낸다.  한강에서 빰 맞고 종로에서 눈 흘리는가 싶다.  딸에 점심과 우리들 점심 메뉴가 달라서, 바쁘게 준비 했는데, 뭔가 엔의 마음에 덜 차는가 보다.  계속 감시하는 눈빛으로 마땅치 않아 하는 태도로 내 근처를 기웃거린다.  엔은 내가 하는 것이 대부분 마음에 들지 않아하니, 참 나도 속이 상한다.  이럴 때는 엔이 일을 많이 하면, 나는 돈 벌지 않는 것 자신은 바쁜 것까지 묵시적으로 들고 나올 수 있다.  내가 일을 조금이라도 더 하고, 가능하면 엔과 거리를 두는 것이 상책이다.

 

딸이 코비드19에 걸릴 수도 있다.  젊지만 알러지도 있고 나처럼 lung이 좀 약한 쪽이니, 많이 힘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혹시나 혹시나 하면서 엔처럼 긴장하고 잔뜩 굳어있으면, 무엇이 나아지는지 모르겠다.  엔은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서, 엔과 함께 있으면 이런저런 도움도 받고, 나같이 능력 부족인 사람들만 있으면 하지 못할 경험들도 하게 된다.  하지만, 난 아이슬랜드 못가고 굉장한 호텔에서 숙박 못해도, 마음 편하게 오손도손 살고 싶다.  엔이 병약한 나를 보호해 주는 것은 알겠는데, 난 그렇게 굳은 얼굴과 불편하게 하는 태도로 건강한 것이 더 나은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엔은 도대체 왜 그렇게 쉽게 자주 tensed 되는 것일까?  나는 어떻게 이 상황을 그리고 엔과의 삶을 대처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좋을까?

 

 

 

 

 

 

 

 

 

 

 

 

 

아침 10시경에 엔이 굳은 표정으로 내 사무실로 들어왔다.  '난, 당신이 ㅇ권사님 얘기를 해서, 당신 얘기에 반응했고, 좀 더 알아보려고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당신은 마치 내가 엄청 시시한 질문을 한 것처럼 대했어.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야.  여러 번 당신이 내 질문을 그렇게 취급하는 것을 경험했고, 그 때마다 기분이 참 나빠.  앞으로는 그럴 것이면 나에게 말하지 말든지, 아니면 그러지 않았으면 해.' 

 

한 5분 남짓 엔의 얘기를 들으며, 어떤 상황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엔의 질문들은 꼭 필요하지 않은 것까지도 많이 꼬치꼬치 깨묻어서, 듣는 사람이 그의 질문(필요없는)에 답하지 못해서 당혹하거나 또는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험을 통해서, 나는 오늘 아침 ㅇ권사님의 얘기를 하다가, 분명 엔의 질문에 대한 선입견과 방어태세를 취했을 것이다. 

 

엔이 이야기 하는 동안에, 먼저 주님께 이 상황 안에서 주께서 충만하여 주시길 기도했다.  부부는 축척된 경험/역사가 있기 때문에 많은 경우에 각자 생각하는 타당한 이유 내지는 변명이 있다.  하지만, 그 순간 난 내 방어적 기분이나 논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난, 엔이 그렇게 내게 와서 말하는 것이 쉽지 않은 노력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은 엔이 우리의 관계가 냉냉해지지 않기 위해, 자신이 기분 나빠서 그러면 내가 기분 나빠지고 하는 냉냉의 서클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하는 애씀임을 알고 있다.  그냥 넘기기엔 엔 스스로의 감정을 엔이 올릴 수 없기에, 또 그렇게 얘기하면 서로 이해하는 성숙함이 있을 수도 있다는 작은 희망이 그 속에 숨어 있음을 알고 있다.  

 

그 순간 알겠다고 앞으로 그렇게 질문을 끊지 않도록 내가 노력하겠고, 혹시 또 그러면 알려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타당한 내 쪽의 이유가 내 앞을 왔다갔다 했지만, 난 쳐다 보지 않고 주님을 쳐다봤다.  이번에는 기분에 나를 뺏기지 않았다.  난, 엔이 불필요한 질문이나 공격적 얘기를 했을 때 반응하면 된다.  그런 것이 없는데, 그럴까바 미리 수를 쓰는 것은 내가 비겁한 것이다.  

 

 

오늘 순서인 사무엘기하 6장을 읽다가, 사울의 딸 미갈의 마음을 상상해봤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삼상 18:20)했고, 블레셋 남자 이백 명의 포피를 바친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삼상 18:27).  그러나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자 미갈은 다윗에게 그것을 알려주고 목숨을 건지게(삼상19:12) 한다.  사울의 이후로도 계속된 추격에 다윗은 멀리 피하여 몇 년의 오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 기간 중에 다윗은 아비가일, 아히노암 두 아내를 맞이 했고, 사울은 미갈을 발디에게 주었다(삼상 25:42-44).  

 

시간이 지나서, 사울은 죽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유다의 왕인 다윗이 미갈을 돌려줄 것을 요구(삼하 2:14)하여, 미갈은 울며 따라온 현남편 발디(엘? 삼하 2:16)을 떠나 다윗에게 가게 된다. 

 

오늘 내가 읽은 부분은, 주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 뛰면서 맨 몸을 드러내며 춤 추는 (삼하 6:20) 다윗을 향해 미갈이, 마음 속으로 다윗을 업신여겨(삼하 6:16) 말하는 내용이다.  미갈은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맨 몸을 드러내고 춤추면 다윗의 체통이 어찌 되겠냐?'고 했고, 다윗은 '당신 집안은 마다하시고, 나를 통치자로 세우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하겠다.  주님을 찬양하는 일이라면 나는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다.  그래도 당신이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라고 대꾸한다.  사무엘기하 6장은, 이런 일 때문에 사울의 딸 미갈은 죽는 날까지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고 하며 끝난다. 

 

미갈은 왜 다윗을 업신여겼을까?  체통 어쩌고 할 때, 미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다윗의 대꾸를 들으며, 미갈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 시절에 자식 없이 그리고 다윗의 사랑 없이(내 상상) 살아가는 미갈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여기서부터는 완전히 나 혼자의 상상이다.  신앙적 지식은 물론 바닥에 가깝고, 믿음도 업 앤 다운이 심하고, 내 개인의 경험과 감정에 기반을 둔, 말하자면 내가 근거없이 쓰는 소설에 가깝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지만, 여러 불가피한 시대적 상황적 일들로, 그 사랑을 outing 해보지고 못하고, 받아보지도 못한 것같다.  다윗이 미갈을 사랑했다는 구절이 내 기억에는 없다.  사랑은 참 기이하여서, 사랑이 꺽인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겼어도 미워했어도 아니 죽이고 싶어했다 해도, 전혀 놀랄 것이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무슨 화 낼 일이냐 싶은 것도, 사랑이 꺽인 사람에게는 분노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때로 미갈도 사랑했던 다윗의 사랑을 갈구했겠지, 사랑스럽게 보이고 싶어서 노력도 했겠지, 입가에 미소도 머금고, 분향도 바르고, 은근히 비치는 옷도 입어보고, 일부러 다윗 앞을 지나갈 기회를 만들려고 우연인듯 먼 길을 돌아돌아 지나가기도 했겠지, 그러나 그런 노력이 번번히 꺽이면서,  미갈의 입가에는 비꼼과 비웃음이 깊게 깊게 패였겠지, 단장도 점점 없어지고, 혼자서 혹시나 하고 기대하다가 상처 받기를 거듭하면서, 일부러 더 관심이 없는 듯 삐딱하게 말하고 행동 했겠지.  그것도 초반에는 삐딱하고 쌀쌀하게 대꾸해서 자기가 속 상하니까 관심을 가져달라는 표현을 그렇게 했겠지.  그런 상태에서 다윗의 맨 몸이 다른 여자들에게 보여지는 것이 무척 싫었을거야, 그것이 대신의 아내이든 여종이든 그들이 다윗에게 관심을 갖고 환호를 하며 함께 기뻐하는 것 자체가 화가 났을거야.  

 

다윗의 차가운 대꾸를 들으며, 미갈은 가슴이 철렁 했을거야.  다윗에게 전혀 미갈 자신을 향한 사랑이 없음을 깨닫으며, 마음이 찢어기게 아팠겠지.  다윗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0.0000001% 혹시나 하는 기대가 있었는데, 그것이 무너졌으니.  남편이 아내와 한 편이 아니고, 아내를 니네 식구들은 이라고 선을 그을 때, 이미 알고 있는 사랑없음의 사실을, 이제 서로 공식화 했으니, 더 이상 착각의 Lux 도 없어졌다.  미갈은 다윗의 이 대꾸를 듣고, 어떻게 반응했을까?  화를 냈을까, 휭하게 몸을 돌려 나갔을까,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고 눈물을 보였을까, 다윗 당신을 존경하는 그 여자들에게 가라고 소리를 질렀을까?  뭐라고 반응했든지, 다 같은 것 아니었을까?  이 일 후에 다윗과 미갈은 서로에게 있어도 없는 존재로 살아갔을 것이다.  미갈은 두고 두고 그 날 그 대화를 테잎 돌리듯 돌리고 돌리며 생각했겠지, 후회와 미움과 억울함과 한탄으로 미갈의 심장도 갈라지고 갈라지다가 오래된 테잎이 결국 힘없이 끊어지듯 미갈의 심장도 스르르 멈추었겠지.  (미갈이 일찍 죽은 언니의 아이들을 키웠다고 하니, 그래도 좀 마음 붙일 곳은 있었겠다 싶다.)

 

사울과 다윗의 권력 욕심과 싸움의 피해자인 미갈은 정치적 희생양이고, 미갈은 다윗을 사랑했지만, 다윗의 영성을 이해 못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못했던 것같다. 

 

미갈은 한 인간으로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세웠어야 했고, 자존심이 상해도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남편인 하나님의 사람 다윗 앞에 좀 더 솔직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다윗의 사랑을 끌어낼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순전히 나에게 하는 얘기이다.  어느 순간이라도,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꿀 수 있는 것이 복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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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2020 11:04 AM)

 

어제 밤에 혼자 식탁에 앉아 한참을 뜨거운 물을 홀짝 거리면서, 이 정도 했으면 이제 할만큼 해봤으니 내려놓을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하고 실패 했으니 헛 짓이었던 것같지만, 안했으면 끝없이 what if를 고민하였을테니, 뭐 남는 장사 남는 헛 짓이었다.

 

물이 너무 뜨거워서 시간이 지체된 것도 있었지만, 엔이 먼저 잠 들기를 바라며 일부러 조금씩 조금씩 천천히 물을 마셨다. 엔은 참 좋은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고 매우 똑똑하고 가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성실한 사람이다. 항상 선입견 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가능하면 도우려고 하는 바른 사람이다. 이렇게 엔과의 관계가 negative할 때조차도 엔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길게 상세히 적을 수 있다는 점에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사랑의 노력을 놓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큰 이유는 줄에 대한 것이다. 내가 실패한 것을 줄에게 권유하기 힘들고,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줄이 이런 사람과 결혼 한다고 하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상상해봤다. 줄이 나처럼 고통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효과는 없겠지만 반대의 마음일까? 곰곰히 생각하다가, 나는 왜 고통 당하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시댁의 이유는 좀 문제가 되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엔이 무슨 평균 이상의 문제성 남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엔에게 휘둘림을 당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조하는데, 엔이 나를 휘둘기 보다는, 내가 엔에게 내 감정을 내맡긴 꼴이다. 내가 엔을 사랑하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엔이 나를 사랑하는 것은 내 컨트롤 밖의 일이고, 더우기 엔이 나를 사랑하더라도 표현을 할지 말지 어떤 식으로 표현 할지는 완전 내 컨트롤 영역이 아니다. 어제 저녁에 문제가 되었던, 내가 남편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한 것은 내 자유이지만, 그 말에 엔이 '나도 그런데, 에이 아쉽게 오늘 하루 다 지나갔네.'라고 하든 '하루 종일 타일 하느라 힘들었는데, 뭐 어쩌라구. 어린애랑 얘기 하는 것같네.'하든 그의 자유다. 내가 엔의 반응에 속상했던 것도 나의 자유고, 엔이 나의 무거워진 표정에 화를 낸 것도 엔의 자유.  그 뒤로 서로 기분 상해서 자기의 입장을 주장하며 답답해대는 것은 서로의 자유.  그러면 어디서 문제가 생긴 것일까?  적어도, 내 컨트롤 범위에서 나는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1) 내가 남편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안하고 말든지, 2) 엔의 반응에 속상해 하지 말든지(= 무거운 표정을 짓지 말든지), 3) 자기 입장을 주장하며 답답해 하지 말든지, 세가지 옵션이 있다.  1)은 간단한 것이지만 사랑을 멈추지 않으면 그렇게 느끼지 않기는 힘들지, 느껴도 말 안하는 것은 한 방법, 2)는 기도하거나 꿀꺽 넘길수도 있지 - 늘 성공하지는 않지만, 3) 엔은 내가 어린애 같다고, 그렇게 남편과 시간이 필요하면 내가 좀 일을 하지 뭐했냐고, 나는 고상(X)해서 감정에 시간 쓸 여유있지만 본인은 일 일 일할 것만 신경쓰기도 힘들다고, (갑자기 일주일 전에 엔이 집 이사 가는 준비 얘기 하다가, 본인은 직장일 직장 알아보는 일 바쁜데, 일 안하는 내가 왜 미리 준비 안했냐고 했던 생각이 났다.).

 

구구절절 썼지만, 내가 내린 결론은 엔이 뭐라 하든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섬, 자아실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제발 제발 이기적이 되어라, 겨우 싸구려 이타적인 것 이상은 못할바에는...

 

 

 

-배경 설명1-

삼 년 전쯤 난 기도 중에 주님 앞에 우리의 결혼을 올렸고 (=이혼 생각을 안하기로 결단했고), 이왕 부부로 살기로 작정했으면, 행복한 부부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기 위해 내가 변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지난 20 여년간 내가 엔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랑하기로 했다. 먼저 사랑한다고 나 자신에게 선언하고 사랑하는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애교도 많고 말과 행동이 사랑스러운 스타일이어서, 내 마음이 정해지고 나니, 엔을 사랑하는 것은 꽤 자연스럽게 되었다. (되는 듯했다.) 물론 말다툼과 실망과 좌절과 무너짐 그리고 사랑과 행복과 기쁨의 up and down이 심하게 요동쳤지만, 그런 것도 사랑의 일부로 생각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Lord, you know all things.  You know that I love you.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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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것도 아니었지.  늘 그렇듯이 아무 것도 아니었어.

 

아직 엔은 화장실에 조금 더 있을 것으로 보였고, 난 침대에 가기 전에 조금 시간이 있어서, 서재에서 유툽을 꼈지.  요즘 코로나 다음으로 핫하게 느껴지는 주식시장의 오늘 상황을 잠깐 듣고 싶었거든.  마침 유명한 사경인회계사나 삼프로에 나와서 상장폐지 종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어서 (정보보다는 지식 방향), 관심있게 집중해서 듣고 있는데, 엔이 침실로 가는 것을 보고, 잠시 후 끄고 나도 침대로 갔어.  저녁 식사를 적게 했더니 훨씬  컨디션이 좋다는 생각과 약간의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말이지. 

 

침대에서 엔이 뭐 하다가 왔냐고 가볍게 묻기에, 삼프로니 사경인회계사니 이런 것은 엔은 모르겠고 우리 보유 종목 중에 상장폐지 가능성이 보이는  belli*을 대처하는 지금 우리 방법이 맞는지 엔과 확인해보려고 얘기를 꺼냈어.  엔은 나의 두서없는 resources  중에서 의미를 뽑아내는 비상한 재주가 있거든.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들은 정리되지 않은 얘기들을 방출하고 엔은 엑기스를 잡아내곤 하지.  그런데 어제 밤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어.  belli* 얘기가 엔에게는 내가 엔이 주식을 잘못 선택해서 손해가 난 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들렸나봐.  나에게 왜 자꾸 belli*의 손실에 집착하냐고 화을 내더라구.  아니라구, 난 오히려 엔의 어카운트가 늘어난 것이 신통방통한 사람이므로 전혀 belli*의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구, 플러스가 마이너스 보다 훨씬 큰데, 그게 무슨 소리냐구, 내가 말해도 엔은 내가 이제까지 보여준 행동이 자기 말의 증거라며 몹시 기분 나빠했어.  

 

참, 왜 내 말을 믿지 않을까?  사람 사이에 오해할 수도 있지만,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엔은 자기가 오해할 확률이 있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걸까?  그럼, 아니라고 하는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가?  침대 끝에 누워서 생각해봤다.  (0)물론 나도 엔을 오해한 적이 많이 있겠지.  그렇지만, 엔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을 믿는다.  적어도 엔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믿는다.  엔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왜냐면, 엔은 착각할 수는 있지만, 내게 거짓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면,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하지 말아야지, 내가 오해하게 하잖아'라고 말할 수 있

지만, 엔이 거짓말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1) 엔과 입장을 바꿔보자.  나라면 안그래 그런 것말고, 지금 엔이 느끼는 것처럼 내가 belli* 샀는데, 엔이 그것으로 인한 손실을 자꾸 얘기해서, 기분이 나쁘다고 입장을 바꿔보자.  (조금 어렵지만, 생각을 해보니) 엔이 그렇게 느끼게 내가 행동한 것에 대해 사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주님 안에서 이것은 무슨 의미인가?  내가 요즘 주식 시장에 너무 관심이 많아서, 주님께 무뎌지는 것에 대한 알림인가?  (3) 새로 형성된 엔과의 불편함은 또 얼마나 지속되는 것인가?  (4) 주식 시장 바닥권인데 엔과 의논해서 좀 더 매입할 생각이었는데, 그것은 물 건너간 것인가?  (5)  하루가 가기 전에 화를 풀라고 성경에 써있고, 취침 기도도 해야 하는데, 내가 지금 기분에 묻히지 말고 용기를 내서 입을 열어야 겠구나.

 

'미안해, 내 의도는 안그랬지만 내 행동이 당신이 그렇게 느끼게 했다니, 미안해.' 그리고 취침 기도를 했다.  말하기 전에도 기도했는데, 주님이 시키시는대로 평화를 위해 내 부족한 것만 보고 미안하다고 했는데,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정말이지 부부로 산다는 것은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엔이 아니면 이렇게 나를 무너질 정도로 힘들게 할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딸과는 결이 다른 것이, 그 아이와 관련해서는 내가 무너지지 않는다, 힘들고 심장이 끊어질 듯이 괴로와도 어떻게 해서든 내가 버팀목이 되어야 하기에 무너지지 않는다.)  엔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혹시 내가 그것을 못 유지하였나 돌아본다.  이 거리를 둔다는 것이 내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부부로서의 거리는 무엇인가.  어떻게 한 몸이면서, 희노애락을 공유하면서, 동시에 유지하여야 하는 건강한 거리는 얼마인지, 모르겠다.  내 안에 있는 장난끼 미숙한 생각 감정 계획 신앙 많은 것을 스스럼 없이 나누면서도, 지켜야 하는 + 지켜주어야 하는 거리는 얼만큼이며,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 너무 어렵다. 

 

엔과 너무 가까와지고 혹시 내 안에 엔에 대한 기대가 커진 것은 아닌가, 소프트하고 스위트하고 감정이 풍부한 내가, 나와는 조금 다른 엔에게 그런 표현을 원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그렇지 않은 모습에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에 이렇게 불편한 것은 아닌지, 나를 살펴보게 된다.  

 

이것은 너무 조심스럽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혼돈스럽다.  기도를 한다.  사랑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부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랑하는 부부는 어떤 것인지.  기도를 한다.  내게 우선 순위를 다시 확인한다.  나의 부족함도 나의 지나침도 주님께서 아신다.  나는 주님 안에서 자유롭다.  그러다가 내가 주님을 사랑함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는 고백이 나왔다.  이것이 영어로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벌써 두어 시간째 뒤치닥 거리고 있는 중이었다.  Lord, you know all things.  You know that I love you.  내 마음대로 사랑하고, 그 사랑이 지나쳐도 그 사랑이 볼품없어도, 언제나 나를 품어 주시는 넉넉한 주님.  엔의 많은 좋은 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너그럽지 않다는 것이 참 힘든데, 주님은 너그러움의 최고봉이 아니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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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엔과의 거리 두기" 부분을 쓰면서, 여러 번 쓰고 지우고 고쳐 다시 쓰고 했다.  내 마음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정확하게 표현되지 않아서 이기도 하지만, 내 마음 생각이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아서가 더 큰 이유라는 것을 알았다.  무언가 내가 엔을 위해 멈춰주려는 느낌과 엔의 영역을 지켜주려는 느낌이 있는데, 나도 아닌 남인 엔의 바운더리를 잘 알수 없어서 애쓰는 뉘앙스가 있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회피라는 생각을 했다.  배려 깊은 것같지만 사실은 나 스스로 딱 버티고 서지 못한 모습이다.  나의 바운더리를 나는 아는가?  엔의 바운더리를 알기 전에 나의 바운더리를 찾는 것이 순서 아닐까?  엔의 바운더리는 엔의 권한이니 알기도 어렵고 엔이 바꾸면, 내가 생각한 그의 바운더리 라인이 또 틀리는 것 아닌가?  나는 건강한 어른이 되기 위해 이기적이 되어야 한다.  not이기적임으로, 매사에 나의 원함, 나의 기쁨, 나에 충실해야 한다.  내가 그런대로 제대로 만들어졌음을 믿어야 한다(=창조주가 나를 제대로 만드셨음을 믿어야 한다.)  그 판단은 엔이나 남이 아닌 내가 내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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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너의 문에 도사리고 앉아서, 너를 지배하려고 한다.  너는 그 죄를 잘 다스려야 한다." (창 4:7)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이 삼 년쯤 된 것같고, 분명히 여기 시카고 집에 이사 온 이후다.  다른 사람들과는 그런 것을 느껴본 적이 없는데, 남편에 대해서는, 나 스스로도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내 속 저 밑바닥에서 깊은 미움(+불편함+억울함)이 슬그머니 올라올 때가 있다. 

 

물론 방금 전까지 헤헤호호 하다가 갑자기 그런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뭐 완전 정신병자인 것이고.)  사소한 마찰이 있었거나, 남편의 말이나 표정이나 행동에서 거북함을 느꼈거나, 내가 그 거북함을 꿀꺽 삼켜 없애려 했는데 목에 걸렸거나, 남편의 애정을 기대/준비했는데 허사로 돌아가서 나 자신에 대해 수치(받아들이기 어려움)를 느꼈거나, 이 중 어떤 것이 발생했든 삼키자 잊자 하고 잠 잤는데 그 다음날 깨어보니 더 또렷하게 아픔만이 남아 있었거나, 등등 내 쪽의 이유야 있다.  하지만 게중에는 정말 사소한 것말고는 별 이유가 없다고 느낄 때도 있다. 

 

초기에는 그저 그 깊은 미움이 날 이끄는대로 화도 내고 억울해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했던 것같다.  남편이나 나나 피차일반이겠지만, 털어보자고 하면, 억울할 이유도 미워할 이유도 화낼 이유도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러고 나면, (again, 피차일반이겠지만) 마음이 완전 만신창이가 되고 둘 사이의 차가움은 견뎌내기 힘들었다.  나는 심하게 낙심하게되고, 마음을 추스리기 힘들었다.  감정의 sensibility가 deep 하고, career를 포함해 더 많은 면에서 서 있지 못한 내가 훨씬 심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감정의 sensibility와 career 등이 나의 치명적인 취약점 (나쁜 것이 아니라 약한 점)이라면, 내겐 깊게 자신을 돌아보고 나아지려고 회복하려고 애쓰는 면과 아직 부족하지만 믿음이라는 절대적인 강점이 있다. 

 

먼저, 자아성찰이 작동을 했다. 나는 현명하기를 선택했고, 가끔은 그 깊은 미움의 감정이 차금차금 올라오는 것을, 그 감정과 내가 분리되어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 감정이 올라오는 것을 알아차리면, '어라, 이러면 힘들어 지는데.'하면서, 그 감정이 나를 흔드는 것을 피하려 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치 가위에 눌린 것처럼 나는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도 번번히 그 감정에 흔들림 당하고 말았었다.  흔들림 당했다고 하지만, 한번 그 감정에 휩쌓이면, 몰입되어 진짜 그렇게 느껴지고, 낙심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막기 위해 남편과 대화도 해보고, 좋은 강의와 좋은 책도 보고, 다짐도 해보고, 여러가지를 시도했지만, 낙심까지 가는 시간을 지연하기는 하여도 여전히 나는 그 감정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가, 한 일 년 반 전쯤에 창세기 4:7을 읽으며, 그것이 바로 그 감정과 나를 표현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그 감정이 올라올 때면 이 구절을 떠올렸다.  죄를 다스리게 도와달라고 많은 기도를 드렸다.  때론 둘의 문제를 두고 나 혼자만 해결하려고 애쓰는 것이 억울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남편의 직장이 다른 주로 옮겨질 때마다 나의 career는 단절이 되었는데, 그것도 못느끼는 남편이 밉기도 했다.  부부의 사랑에 삶의 무게를 두는 나 자신이 참 시시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여전히 낙심할 때도 있고, 마음이 바닥으로 떨어질 때도 있었지만, 계속 그 귀절을 묵상하고 도움을 청하며 기도했다.  나에게 맡기신 나의 사명을 생각하고, career라고 할 것은 없지만 일자리가 생겼음에 감사하며, 부부의 목적은 거룩임에 순종하게 되었다.  나는 누구이고 하나님은 누구신지 인식하고, 본향을 바라보며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다.  아직도 낙심하는 날이 있기도 하겠지만, 내가 우리 부부의 관계를, 우리 각자의 얽힌 문제들과 관계에서 발생한 이슈들을, 깨끗하게 완전하게 만들겠다고 나서지 않기로 했다.  나는 주님의 나라와 의에 힘을 쏟고, 나의 세상 얽힌 문제들은 주께 맡기기로 한다.       

 

 

 

 

한 자매가 있습니다.  늘 자신감도 없고, 옆에서 봐도 엄마 노릇도 아내 노릇도 그저 그렇게 부족하게 보였습다.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닌데, 남들은 다 조금씩 host를 돕고 있을 때도 그냥 식탁에 앉아있거나 옷차림도 번들번들하거나 좀 의아한 경우가 대부분인 자매입니다.  삶을 나눌 때도 늘 자기는 기억력이 나빠서 별 나눌 것이 없다며, 몇 마디 않하곤 하여서, 내 마음에 조금 안스러움이 있었기에, 가능하면 내가 더 관심을 보이고 말 한마디라도 챙겨주려고 하는 자매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감이 떨어지기는 하지만, 탐욕이 심하거나 못된 것은 전혀 아니고, 상황을 설명해주면 곧잘 따라와주기에, 그저 살아오면서 본 것이 없는가보다 싶은 자매입니다.  그래도 교회 관련된 일 몇가지는 꾸준하게 참석하고, 전반적으로 순종을 잘 하는 자매입니다. 

 

이 자매가 아는 분들과 십 여일동안 이스라엘을 얼마 전에 다녀왔습니다.  목장에서 그 얘기를 신나서 하였고, 나도 호응하며 열심히 들었습니다.  주일 친교 시간에도 여행에서 방문한 지역들과 얘기들을 오랫동안 하여서, 잘 들었습니다.  오늘(월요일)은 그 자매가, 친교 때 함께 있었던 세 명으로 단톡방을 만들어서, 그 날 자기가 말한 지역의 부가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 자매가 단톡방을 만든 것도, 그런 부가 설명을 한 것도 처음이어서, 사실 조금 놀랐습니다.  그리고 오후에 목장 단톡방에 다른 분이 글 하나를 올리셨는데, 그 자매가 바로 홀러코슽 얘기를 하며 반응하여, 진짜 놀랐습니다.  자매는 목장 참석 여부에 대한 반응도 90% 이상 안하기 때문입니다.  

 

** 어미가 ~ㅂ니다 에서 ~다로 바뀌었다.  후에 통일하자.

 

놀랐다는 느낌 속에는, 여러 차례 홀러코슽 얘기며, 여행에서 들은 것에 세뇌받은 것같다는 생각, 갑자기 지역 지도 역사에 대해 목소리가 커진 것을 보며, 힘이 들어간 홍위병까지 떠올랐다.

 

오늘 아침 민수기 11:25-30 을 읽으며, 모세가, 장막으로 오라는 명을 따르지 않고 아직 진에 남아 있던 두 남자가 예언을 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여호수아에게, 말한 '네가 나를 두고 질투하느냐?  나는 오히려 주님께서 주님의 백성 모두에게 그의 영을 주셔서, 그들 모두가 예언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귀절에서, 나는 회개했다.  그 두 남자가 명을 따르지 않은 것이 옳으냐그르냐를 따지는 것은 나의 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매님이 홍위병인지 아닌지 그래서 도를 넘을지 않을지는 내가 따지고 말고 -그것도 미리 짐작 판단 정죄- 할 일이 아니였다.  나는 자매님이 이번 여행등을 통하여 주님께 좀 더 나갈 수 있기를 기도해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 어리석고 교만한 자가 깨닫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더불어 나도 도에 넘게 내 힘(응원)으로 자매를 세운다는 교만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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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님께서 한국 방문 동안 목장을 계속 열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목요일 1/30/2020

새벽기도 때, 남편이 내일 목장을 인도했으면 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의 논리를 떠나, 주님 보시기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순종하고 기도했습니다.  내일쯤 샌디에고 회사에서 소식이 올수도 있다고 들었으므로, 좋은 소식이 오고, 남편이 기뻐서 목장을 인도하겠다고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금요일 1/31/2020

샌디에고 회사의 소식은 다음 주 후반으로 미뤄졌습니다.  남편과 계속 희망을 갖자고 대화를 나눴습니다. 

 

목장 음식을 준비하며, 남편에게 '오늘 목장 인도는 당신이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유를 묻는 남편에게, 나는 음식 준비랑 설교 요약도 하니까 좀 분주하다고 하니까, 남편은 '당신 하는 것 봐서 결정할거야'라고 했습니다.  내가 잘 하면, 목장 인도를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앞에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목장은 시작되었고, 남편은 목장을 인도하였습니다.  주님 안에서 은혜롭고 편안하고 감사가 충만한 목장이었습니다.

 

나는, '1 인터뷰 좋은 소식, 2 남편의 목장 인도' 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은 '1 남편의 목장 인도, 2 인터뷰 좋은 소식'으로 순서를 정하신 것 같다고, 남편에게 얘기하였습니다.  기도하였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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